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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아침에] 죽음과 생명의 발견

인간은 시간에 대한 관념을 갖는 특이한 존재다. 그리고 인간만이 유일하게 죽음을 생각하고 영원을 생각하며 나아가 영원한 삶을 소망한다. 요즈음 한국에서는 아름다운 마무리를 위한 웰다잉(well-dying) 수업이 유행한다고 한다. 또한 ‘메멘토 모리’라는 말도 많이 회자하고 있다. 이 말은 ‘자신의 죽음을 기억하라’ 또는 ‘네가 죽을 것을 기억하라’를 뜻하는 라틴어다. 창조주 이외의 존재는 다 죽을 수밖에 없다는 메시지다. 하지만 인간은 반드시 죽는 존재이면서도 자기가 죽는다는 사실을 잊고 살아가고 있다. 필자 역시 평생 멘토로 모시던 김동길 교수님께서 세상을 떠나시면서 자연스레 죽음에 대해 생각하게 되었다.     1998년 가을, 문경새재에 있는 금란정에서 스승님께서 필자에게 성삼문의 사세가를 붓글씨로 써 주셨다.     울리는 저 북소리 목숨을 재촉하네   (擊鼓催人命)   뒤돌아보니 해도 서산에 걸렸구나   (回頭日欲斜)   저승길에는 주막 하나 없다는데   (黃泉無一店)   오늘 밤은 뉘 집에서 쉬었다 갈꼬   (今夜宿誰家)   38세의 성삼문 (1418-1456)이 단종 복위에 실패하여 노량진 강변의 처형장으로 끌려가면서도 죽음 앞에서 초연한 모습을 보여준 절명시다. 스승님께서 직접 붓으로 써 주신 작품이어서 액자에 넣어 오랫동안 서재에 걸어두었다. 하지만 이 시를 읽을 때마다 마음에 큰 부담을 가졌던 것은 사실이다. 왜냐하면 스승님께서 죽음 앞에서 담대하라는 뜻으로 이 시를 써 주셨는데, 사실 이런 마음의 자세를 갖는다는 것이 필자에게는 불가능하기 때문이었다.     죽음이라는 관문을 어떻게 통과하느냐 하는 문제는 우리가 살아온 세월보다도 훨씬 더 심각한 과제다. 스승님의 가르침에 의하면 죽음을 전제하지 않고서는 삶이 아무런 가치도 없다고 한다. 삶과 죽음을 하나로 보라는 것이다. 죽음이라는 것은 내가 태어날 때부터 함께 가지고 있었다. 그래서 죽음은 괴로움이나 고통보다는 그저 의식이 사라지는 상태가 아닐까라고 추측도 해본다. 잠에서 깨어나지 않는 상태이기에 죽음 자체를 너무 두려워할 필요가 없겠다는 생각도 든다. 왜냐하면 죽음은 모든 사람과 생물에게 공평하게 찾아오는 자연현상이며 필연적인 운명이기 때문이다.     자연 위에 초자연이 있고, 시간 위에 영원이 있고, 죽음 위에 영원한 삶이 있다고 믿는다면 삶의 마지막인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아도 될 것 같다. 그렇다면 영원한 삶을 얻기 위해 인간은 무엇을 해야 할까. 인간은 사랑으로 영원을 이해할 수 있고, 사랑을 통해서만 영원에 도달할 수 있기에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해야 한다. 그러면 인간은 사랑 때문에 죽어도 영원히 살 수 있는 존재가 된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사랑이시기 때문이다. 죽음의 발견이 곧 생명의 발견이며 생명을 안다는 것이 바로 창조주 하나님을 아는 것이다. 그러기에 인간은 마지막 순간에 하나님이 내미는 손을 붙잡는 것이다. 손국락 / 보잉사 시스템공학 박사·라번대학 겸임교수이 아침에 죽음 생명 마지막인 죽음 죽음 자체 창조주 하나님

2023-03-20

[최선주의 살며 사랑하며] 생사의 감각

하늘의 끝은 어디일까? 하늘의 끝 다음에는 또 무엇의 시작일까 하는 의문이 시작된 것은 아주 어린 시절이었다. 그 후 학교만 꼬박 27년을 다녔는데도 그 질문에 대한 답은 그때와 별 차이가 없다. 사춘기에 가졌던 철학적 명제 가운데 가장 절실했던 죽음에 대한 사유는 창조주를 알게 되고 영생의 소망을 갖게 되면서 명쾌해졌다. 하지만 화창한 젊음 가운데 생각해보던 죽음은 아직 추상이었다. 몇 년 사이로 정말 많은 죽음을 목격하고 있다. 삶의 구성원으로 생생하게 듣고 보아온 이들을 결별하게 하는 죽음은 어떤 질의 답변과도 상관없이 천길 낭떠러지를 내려다볼 때의 현기증과 함께 속절없는 상실감을 동반하는 적나라한 현실이다. 바람을 붙잡을 수 없는 것처럼 사라지는 생명은 그 어떤 것으로도 지켜낼 수 없다. 전날 통화한 사람이 하룻밤 사이 주검으로 발견되는 현실은 어지럼증을 동반한다.신학적으로나 임상 심리학적인 측면에서 볼 때 죽음은 또 부서진 인간 관계, 삶의 애환과 질병, 영적인 공격을 받는 상태와 밀접한 관련성이 있다.     죽음은 인간이 창조주 하나님과 이간이 되었을 때 시작되었다. 성경에서 죽음이 최초로 언급된 것은 하나님의 입을 통해서다. 인간에게 모든 과일을 마음대로 먹되 선악과는 먹지 말라는 경고와 함께, 먹으면 반드시 죽는다고 하였을 때다. 두번째로 죽음이 언급된 것은 사탄의 입을 통해서다. 뱀이 하나님이 먹지 말라고 한 것을 먹어도 결코 죽지 않는다고 했을 때다. 이것이 사탄이 인간에게 한 가장 치명적이고 또 최초로 한 거짓말이다. 사탄의 최우선적인 공격 대상이 하나님이며 그 다음이 인간을 속이는 일임을 분명하게 보여주는 내용이다.     그렇다면 사탄은 무슨 목적으로 그런 거짓말을 했을까? 바로 생명을 파괴시키고 죽이기 위함이다. 하나님이 창조한 첫 인간이 하나님의 경고를 무시하고 사탄의 말을 들음으로써 죽음이 현실이 되고 인간과 하나님과의 관계가 깨어졌다. 하나님은 인간에 대한 긍휼과 자비로 첫 번째 인간인 아담이 저질러 놓은 모든 잘못을 깨끗하게 청산시켜서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를 본래대로 회복시키기 위해 두번째 아담으로 예수를 인간 세상에 파견했다. 그 분을 통해 죽음을 이기고 다시 사는 것을 보여줌으로써 부활과 영생을 증거시켰다. 그래서 세상의 모든 사람은 두 부류로 구분된다.     첫째는 첫 번째 인간인 아담과에 속한 사람들이다. 인간적인 성정에 따라 살고, 마음에 내키는 대로 살다 죽으면 끝이라는 허무감과 죽음에 대한 두려움 가운데 사는 사람들이다. 죽으면 끝이지만 죽음이 두렵지 않다는 사람들도 흔히 있다. 그러나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해도, 죽음은 여전히 그들에게 있어 허무와 절망, 그리고 의욕을 상실한 채 살아가게 하는 배경이 된다. 죽으면 모든 게 끝이라고 믿는 마음 상태라면 무엇을 하며 어떻게 산들 무슨 의미가 있으랴.     또 다른 부류에 속한 사람들은 두 번째 아담인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들이다. 죽음을 넘어 새로운 삶에 대한 소망을 갖고 영원에 대한 기대감을 갖고 살아가는 사람들이다. 바울 사도는 고린도 교인들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만일 그리스도 안에서 사는 사람들이 바라는 것이 이 세상에서의 삶뿐이라면 그런 사람들처럼 불쌍한 사람이 없다고 천명한다. 믿음은 설명할 수 없어도 믿는 것이다. 영국의 철학자이자 수학자인 알프레드 화잍헤드는 설명할 수 없지만 세속을 초월한 지속적인 것에 대한 감각이 있는 사람들이 가장 행복한 사람들이라고 했다. 창조주 하나님을 믿고 살아간다면 언젠가 그분이 창조한 이 우주의 신비를 이해할 때가 올 것이다. 비록 죽음으로 인한 지독한 상실감 때문에 현기증과 구토, 애간장이 오그라드는 슬픔을 감당할지라도 재회의 소망이 있으면 고개를 들어 하늘을 바라보지 않겠는가. 하늘의 끝은 아직 헤아릴수 없어도 그것을 만든 이를 믿을 수 있다면 감사하지 않겠는가. [종려나무교회 목사, Ph.D www.palmtreechurch.org]   최선주최선주의 살며 사랑하며 생사 창조주 하나님 아담인 예수 상실감 때문

2022-01-28

[최선주의 살며 사랑하며] 생각과 말이 가 닿는 곳

새해가 시작되면 신년특별기도회나 금식기도회 등의 소식을 흔히 듣게 된다. 기도는 사람들이 신과 소통하는 방법이다. 하지만 성경전반에 걸쳐서 발견하게 되는 내용은 하나님은 단지 기도만이 아니라 우리가 일상에서 하는 말을 듣고 반응하신다는 것이다. 민수기 14장에서 “내 삶을 두고 맹세하노라 너희 말이 내 귀에 들린 대로 내가 너희에게 행하리니”라는 구절은 가나안 땅을 염탐하고 돌아온 열두명의 보고를 받은 이스라엘 사람들이 갑론을박으로 시끄럽던 장면에서 나온다.     갈렙과 여호수아는 하나님의 명령대로 그 땅에 들어가자고 제안했지만 나머지 열명은 적들이 거인들임에 반해 자기들은 메뚜기에 불과하다고 하면서 반대했다. 대다수의 보고를 믿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목놓아 울면서 모세와 아론에게 “우리가 애굽 땅에서 죽었거나 이 광야에서 죽었으면 좋았을 것”이라며 불평하고 대들었다. 그들이 또 하나님께 반역하지 말자고 설득하는 여호수아와 갤럽을 돌로 치려고 했을 때, 하나님께서 노를 발하셨다. 모세는 백성들을 모두 역병으로 쓸어버리겠다고 하시는 하나님께 간청을 드렸고, 하나님께서 모세의 청대로 그들을 용서했지만, 하나님 귀에 들린대로 하겠다고 하셨다. 즉 그들이 말했던대로 광야에서 다 죽게 될 것이기에 가나안 땅에 들어가지 못한다고 못박으신 내용이다.     예수는 기도할 때 위선자들이나 이방인들처럼 하지 말라는 조언을 하셨다. 위선자들은 바리새인을 가리키며, 그들은 하나님의 법을 가장 잘 지키고 하루에 세 번씩 시간을 정해놓고 열심히 기도하던 이들이다. 예수님은 그들이 하는 유창하고 우아한 기도를 내용이 없이 허망하다고 하셨고, 이방인들은 기도가 말을 많이 해야 하는 것인 줄 알고 중언부언한다고 지적하셨다.     그런가 하면 “주님은 마음을 보신다(사무엘 상16:7)”는 구절은 성경전반에서 확인된다. 그 예로 창세기 21장에 사라가 아브라함에게 하갈과 그의 아들 이스마엘을 쫓아내라고 하자 아브라함이 슬퍼했다고 나온다. 이어 하나님께서 그런 아브라함을 보시고, 슬퍼하지 말라고 하시면서 이스마엘을 돌보아주실 것이라고 안심시키는 내용이 나온다. 광야로 내쳐져서 마침내 물과 양식이 떨어진 하갈은 아들이 굶어 죽는 것을 차마 볼 수 없어서 멀리 떨어져 앉은 채 소리 죽여 울었다. 그때 하나님께서 천사를 보내어 그녀의 아들이 우는 것을 들으셨다고 전하면서 이스마엘이 큰 나라를 이루도록 하겠다는 약속을 주시고, 하갈의 눈을 열어 물이 있는 우물을 보게 하여 당면한 문제를 해결해 주셨다.     하나님은 그게 불평이든 대화든 한숨이든 기도든 간에 입으로 하는 말과 마음 속에 가진 생각을 다 듣고 계신 분임을 알 수 있다. 우리가 믿는 하나님이 살아 있는 하나님, 연민을 보이시는 하나님이심이 큰 위로를 주지만 한편으론 두렵고 떨리는 일이 아닐 수 없다. 성경은 우리에게 물결이 가 닿는 기슭처럼 우리의 마음에 깃든 생각과 우리의 말이 가 닿는 곳이 하나님의 눈과 귀라고 일깨워준다. 교회 밖에서의 삶과 교회 내에서의 언행이 일치하지 않는 한 기도는 하나님 보시기에 코메디가 될 것이다. 예배나 기도에 회개의 기도가 선행되어야 하는 이유다.     “낮말은 새가 듣고 밤 말은 쥐가 듣는다”는 우리 격언을 “생각은 하나님이 보시고, 말은 하나님이 들으신다”고 비슷한 문장을 만들어 기억해 둘만하다. 말조심을 하라는 격언에서 한 걸음 나아가 생각과 말을 둘 다 조심하라는 경고문으로 기억하면 좋을 일이다. 우리의 혀에 재갈을 물리고 생각하면서 말하되, 우리 마음 속 생각까지 보는 이를 염두에 두고 순수한 마음, 정결한 생각으로 지켜가며 살아가기를 작정해야 하겠다. 창조주 하나님이 우리의 마음을 보시고 우리의 말을 듣고 계시기 때문이다. [종려나무교회 목사, Ph.D www.palmtreechurch.org]     최선주최선주의 살며 사랑하며 생각 창조주 하나님 하나님 연민 하나님 보시기

2022-0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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